아웃미저 - 사이클롭스의 상자
미저리의 종족이 사이클롭스라는 동인설정 기반.
살카즈와 사이클롭스에 대한 날조, 특히 과거사 날조가 심합니다.
9, 10, 12지 스포일러를 전제로 합니다.
미저리 > 아웃캐스트 일방 짝관을 먹고 있습니다...
아웃캐스트는 알면서도 부드럽게 밀어내는 그런 안 사귀는 사이이지만 미저리가 제게 CP라고 적어달라고 협박했습니다...
사이클롭스는 미래를 본다. 어디까지 볼 수 있는지는 개인별 편차가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이클롭스는 어느 순간 다가올 미래를 알게 된다. 그것은 옛 샤먼들이 다루던 주술이 아츠라 명명되기 이전부터 그들의 핏줄에 흐르는 힘이다. 그래서 그들은 살카즈라 명명되었고, 살카즈의 한 분파가 되어 지금까지 이어졌다.
그러니, 현실에 달관하여 초연한 모습을 보이는 사이클롭스라는 것은 그들 사이에서는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예언자가 보이는 초연함이란, 차라리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초연할 수 있는 자들은 강한 성정을 타고났거나, 초연할 수 있는 미래를 보았음이니.
많은 사이클롭스들은 초연하기보다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이길 택했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 일에 부정적일지언정, 선지자로서 부여된 의무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이클롭스란 본래 그러한 존재여서, 한 살카즈 청년은 제가 바깥 세계에서는 비관적이라 여겨짐을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가 본 예언을 따라 한참을 남하하고도 또 한참이 지난 어느 날의 일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제 비관적임을 싫어하지 않았다. 여느 사이클롭스들이 그렇듯 그는 비관을 제 종족의, 미래를 아는 이들이 응당 함께 걸어야 할 존재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비관과 함께 걷는 그는 제 다른 친구들이 저를 별명으로 부르도록 두었다.
미저리.
그에게는 현실과 별 다를 것 없는 의미의 단어였으므로.
미저리는 예언을 따라 로도스 아일랜드에 왔다. 허나 사이클롭스가 테라에서 모습을 감춘 지금에도 살카즈의 예언이란 불길하기 그지없다 여겨지는 것이라, 미저리는 녹은 대지를 밟자마자 입을 다물고 눈을 가리는 법부터 배웠다. 다행히도, 오퍼레이터별 종족 특성을 배려하여 설계된 삼중 고글은 미저리를 한낱 살카즈로 여겨지게 하였다. 간혹 고글의 렌즈가 왜 셋인지 궁금해하는 치들에게서는, 제 아츠로 멀어지면 그만이었다.
"미저리, 또 혼자 도망쳐 나온 거냐?"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갓 빙원을 떠난 사이클롭스에게 있어 눈이 쌓이지 않은 테라의 나머지 부분은 늘 새로웠지만, 그중 가장 새로웠던 것은 어느 종족의 머리와 등 뒤에 '떠다니는' 빛무리였다. 나이 든 산크타는 어린아이의 호기심을 제지하지 않았으나, 미저리는 그저 세 눈 전부를 빛을 지켜보는 데만 사용할 뿐이었다. 산크타는 기다렸고, 살카즈는 그리 오래지 않아 침묵을 깼다.
"아웃캐스트."
"오냐."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더 가까이에서 봐도 될까요."
노인 - 아웃캐스트는 크게 웃었다. 듣기 좋은 웃음소리에도 미저리의 표정은 그리 변하지 않았지만, 연륜 있는 산크타는 그의 반응에 아랑곳 않고 한 걸음 다가섰다.
"뭣하면 아예 만져 봐도 된다만은."
그렇게 말하며 제 머리 위를 가리키는 아웃캐스트에게, 미저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빙원을 떠나온 이래 타인의 호기심을 겪는 것은 진절머리 나게 겪었다. 대부분은 제 세 번째 눈을 향했다. 미저리는 누군가가 제 이마에 손대는 것이 불쾌한 만큼 타인에게도 거리를 존중할 셈이었다.
알겠다며 웃으면서도, 연장자다운 배려는 어딜 가지 못해, 아웃캐스트는 미저리가 거리를 두려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그의 옆까지 바싹 다가왔다. 그대로 함교의 난간에 기대 바깥을, 눈이 없는 대지를 향하는 입가엔 미소가 걸려 있다. 미저리는 제 옆까지 온 산크타의 머리 꼭대기를 물끄럼 내려다본다. 헤일로는 이제 잡힐 듯 가까운 위치에 떠 있다. 그가 보고 믿은 미래의 한순간도 지금의 헤일로보다 선명하지 않다.
미저리는 찰나에 느낀 감정을 특별하게 기억하기로 마음먹지 않았음에도, 순간은 자연스레 그의 뒤를 따른다. 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고, 곱씹고 인정하는 것은 그보다 오래 걸린다. 그럼에도 결국엔 제 뒤를 따라온 것의 이름을, 무게를 알게 되고 만다.
그가 본 미래에 없던 감정이다.
사이클롭스 예언자들이 매 분 매 초의 미래를 아는 것은 아니다. 미저리가 본 것은 한때의 단편이자 결말로, 그때에 이르는 과정이나 결말 그 뒤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그러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고 다만 초연히 이 또한 과정이리라 받아들였다. 허나, 한 산크타를 만나 동료가 되고 교류하고 그 모든 과정을 거쳐, 앎으로 인해 얻은 비관과 예상치 못해 얻은 슬픔 사이에는 빙원의 크레바스만큼이나 깊은 골이 있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닫는다.
아웃캐스트는 그와 같은 감정의 무게로 그를 대하지 않는다. 미래를 점칠 것도 없이, 그는 무언의 의지로 그것을 알게 된다. 그는 어느 구름 낀 밤에 이루지 못하는 잠을 붙들고 한참을 뒤척이다 제 이름의 무게를 새삼스레 깨닫게 된다.
미저리. 그가 택한 현실의 수식어를.
마음은 갈 곳이 없어도 시간만은 착실하게 흘러간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면서도 미저리는 제 임무만은 퍽 그럴듯하게 수행해 낸다. 하나의 태양과 두 개의 달을 따라, 거품이 이는 맥주잔을 기울이고, 테라를 항해하는 배에 실려 노래하며, 그들은 멈추지 않고 나아간다.
그는 제가 본 미래를 신뢰하나, 이제 본 것만을 신뢰하진 않는다. 태양의 내리쬠과 달의 어루만짐을, 맥주 거품이 꺼지고 난 텁텁함을, 매번 음정이 달라지는 어느 뱃노래를 신뢰한다. 세 번째 눈으로 본 것은 진실이지만, 전부가 아니다. 미저리는 여전히 세상만사를 회의적으로 대하지만, 또 어떤 때에는 판도라의 유산을 나서 부정하진 않는다. 어쩌면 이 상자 같은 함선에 그 유산의 이름을 붙여도 좋으리라고, 그는 세 눈을 감으며 생각한다.
그리고, 당신이 스러진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한 미래에서.
사이클롭스라고 해서 미래에 일어날 모든 일을 아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세 번째 눈은 한정적으로 기능하며, 내다볼 수 있는 미래를 선택할 수도 없다. 미래로 가는 길에서 사이클롭스가 현자로 여겨지는 것은 그들의 예지로 인한 것인 그들 스스로가 쌓아온 지성에 기반한다.
그러나 지성이란 감정 앞에서 쉽게도 무너지고 만다. 소식을 전한 이도, 함께 있던 동료도, 미저리의 안색을 먼저 살핀다. 미저리는 살카즈의 전장에서 물러날 의지가 없었으나, 그가 받은 걱정에 보답하기 위해 찰나간의 휴식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제 꼬리에 다가든 감정을 마주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밀려오는 슬픔의 파도 앞에서 고요히 밤을 보내기란 너무도 힘이 든다.
애써 잠을 청하려던 사이클롭스는 결국 일어나 앉는다. 몸이 들썩임과 함께 그의 눈가에 맺혀 있던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그는 닦을 생각도 하지 않고 고글을 더듬어 찾는다. 일어나 문을 열면 복도는 고요한 적막에 휩싸여 있다. 미저리는 그 적막에서, 다른 날과는 다른 침울함을 읽어낸다. 침묵 위에 발을 디디면, 그제야 신발도 신지 않았음을 깨닫지만 그는 나아간다.
주인이 외출한 방의 문이 열릴 리 만무하건만, 미저리는 오늘만큼은 금기를 깨기로 한다. 늘 노크하던 자리에 소리없이 손을 대면, 문이 크게 일렁이며 그가 나아갈 길을 연다. 들어선 방은 주인의 성격만큼이나 온화하기 그지없으나, 모두 어둠과 적막에 감겨 있다. 방의 주인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어둠을 밝히는 헤일로는 영영 꺼졌고, 날이 밝으면 누군가는 이 방을 정리해야 할 터다. 그 전에, 누구도 차마 바로 들지 못한 망자의 공간 한복판에 미저리는 섰다.
미저리는 아직 다른 광원을 찾을 준비가 되지 않았고, 야시경을 겸하는 고글은 빛 없이도 그의 시야를 틔워냈다. 빛 없는 세상에서 익숙한 물건의 면면이 아른거린다. 이제 이 모든 것에는 주인이 없다. 매일같이 닦음에도 꼭 이럴 때만 흐려지는 고글의 시야는 미저리가 찾는 물건을 잡아내지 못했으나, 미저리 자신마저도 무엇을 찾아 이 방에 왔는지 모르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다.
괜히 손때 묻은 서랍을 열어 본다. 오래된 노트 몇 권, 사진이 끼워져 있을 앨범. 그것에는 차마 손대지 못하고 서랍을 다시 닫는다. 나무가 긁히는 소리는 미저리에게 우울을 더욱 안긴다. 한쪽 벽에 늘어선 장화도, 유리병 속 종이학 사이사이에 고개를 내민 탄피도, 옷걸이에 걸려 있는 코트도, 그저 침묵을 지킬 뿐이다. 이제 고글은 뿌예지다 못해 습해졌다. 미저리는 고글을 벗고, 허락받지 않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터앉는다. 어둠은 더 이상 무엇도 보여주지 않지만, 그의 들썩이는 어깨를 보듬어 주지도 못한다.
몸을 앞으로 내밀고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있던 청년은 곧, 홀로 되어 진정한다. 감정을 추스리며 다시 고개를 들면, 그새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얼핏 방의 모양이 들어왔다. 입가는 쓰기만 하나 그렇다고 웃지 못할 것은 아니다.
"참 아웃캐스트, 당신 같은 방이네요."
당신을 향해 중얼거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댄다. 그제야 등받이에 걸려 있던 것의 존재를 눈치챈다. 손을 뒤로 돌리면 챙이 멋들어지게 선 모자가 손에 잡힌다. 아웃캐스트가 뭐라고 했더라, 챙만 남아 있으면 전부 모자라 했던가? 나이 든 총잡이는 눈을 보호할 조준경이나 고글 대신 챙이 달린 모자를 고집했다. 산크타의 종족 특성 때문에 아웃캐스트의 모자는 대부분이 이마와 챙만 남아 있었다. 천 대부분을 버려가면서도 모자를 고집하는 산크타는 흔하지 않았으니 그는 가진 모든 모자를 손수 재단해야 했다. 미저리는 그때 옆에서 딴청을 피우곤 했었다. 희미하게 웃은 청년은 모자의 빳빳한 천을 조심스레 쓸었다. 아웃캐스트가 심지까지 새로 박음질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못내 아쉬웠다. 그리고 보지 못한 것도.
사실, 당신이 웃는 것을 좋아했다. 당신의 여유로움과 몸에 밴 친절을 좋아했다. 비관적이게 되는 사이클롭스와는 다르게, 아웃캐스트 당신은 늘 사람들에게서 희망적인 면을 찾았다. 그래서 당신이 보고 싶다. 모자를 쓴 것도, 모자를 벗은 것도. 당신이라면 무엇이든 전부 다.
사이클롭스는 주인 잃은 모자를 돌려가며 뜯어보다 또다시 눈물을 떨궜다. 이윽고, 고개를 숙이고 모자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댄다. 감긴 눈 위로 거친 천의 감촉이 생경했다. 미저리의 세 번째 눈에 관심을 보인 사람들은 많고야 많았지만, 미저리는 어떤 이유에서건 제 눈을 건드리는 것을 허한 적이 없었다. 사이클롭스들에게 세 번째 눈은 단순한 눈 이상의 의미였으므로.
눈을 내줘도 아프지 않을 사람은 이제 이 테라에 없다. 오래 살았음에도 여즉 보지 못한 빙원의 오로라를, 예지가 실현된 이후에는 꼭 보러 가자 청하려던 결심은 입밖에 내기도 전에 침묵이 되었다. 사이클롭스는 말이 없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언임에도 다가온 신뢰, 그리고 세 눈으로 본 것들뿐.
미저리는 모자에 없는 온기를 오래도록 느낀다. 마지막 눈물 방울은 그의 세 번째 눈에서 천으로 스며든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는 마지막으로 방 안을 둘러보고, 모자를 제자리에 돌려 놓는다. 그 또한 알고 있다. 그가 받은 예지는 쉬이 실현될 종류의 것이 아니며, 그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상실이 동반될 수밖에 없음을. 그가 한 사이클롭스가 아닌 로도스 아일랜드의 일원으로 여즉 그 이름을 사용하는 데에는 제가 가야 할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으니.
하지만 그래도, 당신은 너무 빛나 영영 그 자리에 있을 줄 알았다. 미저리는 쉬이 떨쳐지지 않는 미련을 등지고 애써 방을 나선다. 일렁인 벽은 그에게 아무런 말도 건네지 않지만, 미저리는 불현듯 아웃캐스트가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는 착각에 빠진다. 그러나 급히 돌아본 뒤에는 단단한 벽이 침묵을 지킬 뿐이다. 미저리는 천천히 고글을 쓴다. 이제 시야는 흐리지 않다. 지금은 그 정도면 족하다. 이루어지길 기다리는 예지가 있고, 그보다 앞서 동료들이 선한 마음으로 바란 세상이 있다.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다. 복수를 위해 저울 위에 당신과 내가 믿는 가치를 올릴 생각도 없다. 그저, 어둠을 홀로 나아가며 조금쯤은 이름보다 더 외로워할 뿐이다.
많은 사이클롭스들은 초연하기보다 비관적이거나 염세적이길 택했다.
그러나 한 청년은 모든 순간에 부정적이기보다는, 로도스 아일랜드의 엘리트 오퍼레이터로서 지기로 한 의무를 저버리지 않기를 택한다.
때로는 발걸음 끝의 파문이 흔들리고, 내미는 손이 하염없이 떨리고 있더라도.